내일의 終

한국과 일본이 동족임을 밝힌다

동방존자 2011. 7. 14. 16:34

        한국과 일본이 동족임을 밝힌다

고대 일본 열도는 미개한 선주민들의 터전이었다.

그곳으로 선진국 한반도의 삼국(신라,백제,고구려) 사람들이 대형 선박을 이용해

잇따라 건너갔다.

이때부터 미개의 터전인 일본 열도에 한반도의 선진문화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삼국 사람들과 선주민 간의 혼혈도 자연스레 이루어지면서 고대 한국인들

은 일본 열도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먼저 한반도 남쪽에서 일본 남쪽의 키타큐슈(北九州)지역으로 건너간 세력이

지배의 터전을 일구기 시작한 때가 바로 '야요이 시대'(BC 3세기~AD 3세기경)다. 그 후 4세기 후반 무렵부터 한반도인(주로 백제인)들은 서서히 일본 열도의 동쪽

으로 지배의 터전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선진국 한반도의 사람들이 동진함으로써 일본 내해(內海, 세토나이카이)

일대이며 오늘의 오오사카 지방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의 지명은 카와치(河內)였다.

이 시대의 한국인 지배자들로는 오우진(應神, 4세기경) 천황과 그의 아들 닌토쿠

(仁德, 5세기) 천황 부자를 꼽을 수 있다. 이들 백제인 부자에 의해 고대 일본의

카와치(河內) 왕조가 세워졌다.

백제의 정복왕인 닌토구 천황에 의해 성립된 카와치 왕조는 오오사카 지방을

중심 무대로 번성하게 된다.

 

그들이 한국인 정복왕이라는 사실을 토우쿄우 대학 교수 이노우에 미쓰사다

(井上光貞, 1917~)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오우진 천황은 4세기 중엽 이후의 일본 정복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와세다 대학 교수였던 미즈노 유우도 오우진 천황과 닌토쿠 천황 부자가

백제국 왕가의 왕들이라며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일본과 한반도와의 교섭에 있어서, 특히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오우진,

닌토쿠 천황 시대 이후부터 서로의 관계 역사 자료가 눈에 띄게 많이 나왔다.

오우진, 닌토쿠 천황 등 닌토쿠 왕조(카와치 왕조)는 외래민족의 세력으로서,

일본에 침입하여 일으킨 정복 왕조다. 닌토쿠 왕조는 대륙적인 성격을 갖는

새로운 왕조였으므로 대륙의 사정에도 정통했다.

따라서 그쪽 정세에 관해서도 민감했으며, 특히 그 지배층이 백제국 왕가와

동일민족계통(백제왕은 부여족)에 속한다. '

백제인 오우진 천황 때 등장한 백제복식

오우진 천황과 닌토쿠 천황 부자가 4세기 중엽 무렵부터 왜나라를 지배하기

시작한 백제인 정복왕이라는 사실은 이밖에도 여러 귄위 있는 일본 고대

사학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특히 일본의 역사책들이 입증하는 백제복식사도 크게 주목된다.

최초의 백제인 정복왕이었던 오우진 천황이 백제옷을 입었다는 사실은

일본서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오우진 천황 14년 2월조를 살펴보면 왜나라에서 의복을 최초로 만든 의봉시조

(衣縫始祖)는 백제 임금이 보낸 재봉사인 진모진(眞毛津)이라는 여인이다.

진모진은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이 왜나라에 파견한 백제 여성이다.

진모진은 미개한 왜나라에 건너가 백제식의 의복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로써 비로소 왜나라 의복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가장 먼저 지은 옷은 오우진 천황을 위한 왕복이었을 것이다.

이 옷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백제왕과 똑같은 형태의 조복(朝服)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모름지기 오우진 천황이 백제인으로서 백제 조복을 입었음은

물론 그후에도 계속해서 백제 조복을 입었을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것은 오우진 천황으로부터 18대째의 백제인 스이코 천황이 등극

을 때 만조 백관이 백제옷을 입었다는 "부상략기"의 기록이다.

오우진 왕조 때부터 복식을 관장하는 최고관리도 백제인이었다고 "신창성씨록

(新撰姓氏錄, 815년 편찬)"에 밝혀져 있다.

왕실의 복식담당 최고관리는 오복조(吳服造)라는 관칭을 썼는데,

 "오복조는 백제인 아누사(阿漏史)다" 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오우진 천황 지배 시대의 왜나라에 살던 서민들은 어떤 옷을 입었을까.

에도 시대의 고증학자로 저명한 토우테이칸은 그의 저서 충구발(衝口發)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오우진 천황 시대에 봉녀(縫女) 두 명을 보내 주어서, 비로소 임금과 신하들이

한복(韓服)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서민들은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모양

었다고 한다."


토우테이칸은 이와 같이 일본결척(日本決尺)이라는 고대 문헌을 인용해서

밝히고 있다.

일본결척에서는 그밖에도 오우진 천황 이래로 백제인들이 왜나라에 건너옴으로써

의상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과, 왕실에 비단옷이며 각종 의상이 보관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한복을 입은 그림까지 직접 그려서 제시하고, 이 옷이 오오사카 동부

(河內國,카와치 땅) 산속 옛무덤에서 파낸 것이라고 했다.

옷의 생김새는 도포로서 깃을 쪽으로 여미며 소매 끝이 좁은데, 이 옷을 입던

시대는 텐치 왕조(天智王朝, 661~671) 이전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텐치 천황은 '백제대궁'을 짓고 살았던 백제인 죠메이 천황의 차남이다.

그러므로 도포로 보이는 이런 한복이 7세기까지 줄곧 이어져 온 것을 잘 알 수

있다.

한복 그림 옆에는 '재봉은 한복임을 알 수 있다'는 토우테이칸의 설명이 있다.

천황의 한일동족 고문서 분서사건

역사상 최초로 한일동족론을 세상에 공표한 사람은 일본 남조(南朝, 14세기)

시대의 유력한 정치, 사상적 지도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1293~1354)다.

그의 저서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14세기 중엽)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한일

동족론을 확실하게 뒷받침하고 있으며, 한일동족론에 대한 분서사건의 놀라운

사실도 지적하고 있다.

'옛날 일본은 삼한과 동종(同種)이라고 전해 왔으며,

그 책들을 칸무(781~806) 천황 때에 불태워버렸느니라.'

칸무 천황이 백제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역사적 사실이다.

고대 문헌 "袋草子"(1157경)에는 칸무천황의 생부인 코우닌(光仁)천황(770~781)이

히라노신(平野神, 백제 성왕)의 증손임이 밝혀져 있다.

그러기에 저명한 사학자 키타야마 시게오는 칸무 천황을 가리켜 "백제왕계 귀화인

의 핏줄을 타고 났다"고 지적했다고 본다. 칸무 천황은 왕도인 헤이안경 북쪽(현재

의 京都市 北區, 平野神社)에다 백제 성왕과 비류왕,초고왕 등 조상신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 지낸 일본천황이다.

그와 같이 백제왕들을 제신으로 섬기는 등 한반도인의 피를 이은 칸무 천황은

어째서 전국 각지의 관원들을 동원해서 한반도인과 일본인이 동족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옛 서적(족보)들을 모두 불태운 것일까.

이 점에 관해서는 현재까지 한일 양국 학자들 간에 전혀 논의된 바가 없다.

"신황정통기"의 저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는 예리한 역사관을 가진 학자며

정치가로, 전제군주 치하에서도 역사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올곧은 모습을 보여

줬다. 그가 칸무 천황 때의 한일동족 역사기록 분서사건을 지적할 수 있었던

근거는 9세기 초엽의 "코우닌시키(弘仁私記)"였다고 본다.

코우닌시키는 9세기의 일본왕인 사가(809~823)천황의 지시로 성립된 기록인데,

거기에는 단지 칸무 황이 책을 불사르게 했다는 극히 짤막한 내용만이 실려

있다.

그러므로 분서 사건의 원인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더구나 일본 관찬 역사책인 '속일본기'와 '일본후기'의 칸무 천황조에는 분서

건에 대한 기사가 전혀 없어서 그 원인 규명은 결코 쉽지 않다고 본다.

분서사건에 대해서 몇가지 요인을 추찰하고 있다.

첫째는 원주민인 수많은 농민들의 조정에 대한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즉 농민들은 백제인 왕가의 지배를 받으며 조공을 바치는 농노(농민 노예)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당시 징병과 부역에 강제로 징발되어 이러저리 끌려 다니며 매우

피폐해져 있었다. 이를테면 칸무 천황은 두 번씩이나 왕도를 옮기느라 수많은

농민들을 징발해서 도성을 쌓게 했다.

785년 도성 축성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징발되어 온 농민은 자그마치 31만 4천

명에 달했다.

또 에미시(아이누족, 지금의 훗카이도 지역 등)의 침공으로 (783년부터) 토벌

전쟁에 농민들이 징병되어 많은 사상자가 속출하는 등 농민들은 귀농하지 못하고

크게 시달렸던 것이다.

반면에 백제인 왕족과 귀족 및 승려들은 전국 각지의 산림과 농토를 소유하고

호의호식하며 부유하게 살았으며 지방관리들의 부패 또한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칸무 천황은 조정의 조신 등 고위 신하들을 백제왕족들을 중심으로

발탁했다.'(속일본기)
칸무 천황은 집권 후기에도 덕정을 베푸는데 힘썼으나 지방 귀족이며 토호(土豪)와

농민들 사이에는 날로 대립이 심해졌다.

 

그 당시에 키타야마 시게오는 이렇게 지적했다.

'칸무 천황의 2대 정책인 군사와 조공에 의해 피폐해진 농민들의 형편은 이제

급기야 천황을 비롯해서 중앙의 권력자들을 위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천황은 말년이 되자 천하에 덕정을 행하기로 마음속 깊이 결심했다.

이래서 제4차 에도 토벌의 중지와 헤이안궁 건설 공사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칸무 천황은 조정의 요직에 모두 백제인들을 앉혔다.

또 백제왕족인 조신들의 주청을 언제나 잘 들어주었던 내용들이 관찬 역사책

'속일본기'의 칸무 천황조에 허다하게 전하고 있다.

칸무 천황이 궁중의 백제왕족 조신들 중에서도 가장 총애한 신하는 백제왕

명신(明信, 메이신)이었다. '백제왕'이란 백제왕족의 통칭이다.

그 내용은 스가와라노 미치사네(管原道眞, 845~903)가 892년에 편찬한

'루이쥬 코쿠시'에 잘 나타나 있다.

795년 4월의 왕실 연회 때 칸무 천황이 몸소 명신(메이신)에게 와카(和歌)를

읊어주었다. 명신이 그 시가에 화답하지 않고 잠자코 있자 칸무 천황이 대신

화답했다.

이와 같이 철두철미하게 백제왕족들을 거느리던 칸무 천황이 한일동족론 관련

서적들을 불태우게 한 이유는 모름지기 백제인 왜왕가가 '일본화'를 크게 서두른데

있다고도 추찰된다. 즉 고통받는 선주민 농민들이 백제인 천황가의 통치를 받으며

위화감과 열등감 등으로 불만이 고조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억제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본국인 백제는 이미 660년에 망한 지 벌써 백 수십 년이나 되었고, 한반도

는 백제를 멸망시킨 통일신라의 시대인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왜나라

의 백제인 왕가는 통일신라 왕가에 분노와 적개심마저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오우진, 닌토쿠 천황이 백제왕족이라고 하는 미즈노 유우의 논술을 살핀

바 있다.

그런데 그는 그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는 것을 우리는 주목하게 된다.

'상고시대에 우리 왕조(일본왕조)는 끊임없이 백제와 연합했으며,

신라를 '공동의 적'으로 보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 유대적인 숙명을

지니고 왔다는 것을 살피게 된다.'

즉 오우진, 닌토쿠 천황은 백제인이고, 그러기에 왜왕가와 백제는 한 핏줄로서

신라에 대한 원한을 품고 연합해왔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이 삼한과 동족이다'라고 하는 발자취에 대해서 백제인 칸무 천황의 왕가는 비통한 과거의 기억을 지워버리려 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추론에 불과하다.

그런데 칸무 천황 당대의 신라는 여러 왕의 계승이 이어졌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선덕왕(780~785), 원성왕(785~798), 소성왕(798~800),

애장왕(800~809)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전쟁이나 큰 충돌이

없었다.

 

한일 양국의 역사책을 보면,

 

우선 '삼국사기'에는 다음 두 대목의 기사가 있다.

'애장왕 3년(802) 12월, 왕이 균정(均貞)에게 대아찬 벼슬을 주고 그를

가왕자(가짜왕자)로 삼아 왜국에 인질로 보내려고 했으나, 균정은 이를 거절했다.

4년(803)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파견하고 황금 3백냥을 진상해 왔다. '

일본 관찬 역사책인 속일본기와 일본후기에 각기 칸무 천황 당시의 기사가 전해

오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사료에는 대신라 관계 기사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일본후기에만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칸무 천황 19년(799) 5월 29일 신라사 파견을 중지했다.

 칸무 천황 24년 9월 18일 병부소승(兵部少丞) 정6위상 신마리를 신라국에

파견했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해 둘 것은 일본후기의 칸무 천황조는 모두 13권이나 그중

네 권만이 전하고 나머지 아홉 권은 결권(缺卷)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 결권들속에 '한일동족론 분서사건'의 기사가 그 어딘가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것도 여기 덧붙여둔다.

결권에 관해서는 일본학자들도 원인규명이 안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우닌의 난(應仁之亂, 16세기)때 책이 흩어져 없어진 게 아닌가 한다'고

요시오카 마유키는 논술하기도 했다.(일본후기, 1975)

여하간 일본역사에서 한일동족론의 진원이 백제인 칸무 천황 당시에 불거져 나와 그것이 분서사건으로
까지 이어졌다면, 당시가 비록 전체 통치시대였다고 하더라도 그 파장은 왕가와 백성들 사이에 엄청나게 큰 것이 아니었던가 추찰케 한다.

한일동족론의 발설은 키타바다케 치카후사 이후 약 4백여 년이 지나야 다시

이야기된다.

즉 한일동족론은 에도 시대의 토우테이칸(1732~97)을 비롯해서 메이지 시대(1868~1912)의 쿠메 쿠니
다케(1839~1931), 일제 군국주의 치하의 키타 사타키치

(喜田貞吉, 1871~1939), 카나자와 쇼사브로(1872~1967) 등의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다만 한 가지 미리 밝혀두자면 그들이 '한일동족론'을 어떤 목적으로 연구했건간에 '한국인과 일본인은
동일 민족'이라는 근본정신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의 다음과 같은 역사관은 매우 설득력 있는

논리라고 본다.

고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한과 중국 대륙 및 남양 방면으로부터 일본 열도

에는 끊임없이 씨족적으로 집단 이주해왔다. 그들은 이미 토우호쿠(東北) 지방의

변경지대며 이즈의 7개 섬에 이르기까지 각지에 흩어져 토착하여 살았다.

또 당시는 아직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도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주해온 사람들

은 어느 특정한 나라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부락민 또는 씨족의 구성원으로서 다

른 집단들과 뒤섞여 살게 되었다고 본다. 그런 가운데 그들 속에서 유력한 호족이 나타나게 되고, 본국으로부터 유력한 씨족들이 계속해서 건너옴으로써 차츰 중앙정권을 이루기 위한 권력 다툼이 생기게 되었다고 본다. 특히 바로 코앞에 있는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호족을 대표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이와 같이 일찍부터 일본 열도에서 조직적이고 강력한 세력을 이룬 한국인 호족들

은 그들이 모시게 된 한국인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식민지 경영에 착수했다. 또 그들 역대 천황들은 사당(신사, 신궁)을 세우고 백제신, 신라신에게 신상제

(新賞祭)라는 제사를 지냈다.

쿄우토 히라노 신사의 제신(祭神)들은 백제신


쿄우토시 키타구 히라노미야모토쵸에는 '히라노 신사'라는 큰 사당이 있다.

그러나 이곳의 제신들이 백제왕이라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것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조차도 이 히라노 신사가 고대부터 백제인 천황가의 신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이나 겨우 알고

있을 정도이다.

쿄우토 관광안내 책자 등에서도 히라노 신사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

쿄우토의 관광회사들도 관광버스의 명소 순회 코스에 히라노 신사를 넣고 있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히라노 신사는 백제인 칸무 천황이 8세기부터 그의 백제 조상신들을 모시고 궁중 제사를 지내온 유서
깊은 터전이다. 그런데도 오늘의 일본인들은 이 유명한 신사를 모르거나 어쩌면 알아도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백제신을 모신 신사이기 때문일까.

사실 쿄우토라는 일본의 대표적인 왕도이며 유명한 문화유적도시가 생긴 것도

바로 칸무 천황에 의해서였다. 칸무 천황은 나가오카경에서 천도하여 794년에

쿄우토 땅을 새로운 왕도로 삼았다.

칸무 천황은 당시 쿄우토의 새 명칭을 헤이안경(平安京)이라 칭하고, 백제신의

신사도 이곳으로 옮겨 모시게 한 것이다. 그러니 이 히라노 신사야말로 장장

1200년 이상 이어온, 참으로 유서 깊은 명소가 아닐 수 없다.

"지난날은 해마다 4월 2일 이곳에서 성대한 제례 행사가 거행되었다.

역대 천황가의 황태자며 공주, 조정의 대신 이하 고관 등은 해마다 2월과 11월의 상신일(上申日, 첫 원숭이날)을 제일(祭日)로 정해 백제신들에게 제사를 모셨다"라고 저명한 국학자 니시쓰노이 마사요시(西角井正慶, 1900~71)는 밝히고 있다.

이 제사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10세기 초의 왕실 율령세칙인 '엔기식(延喜式)에도 엄연히 기재되어 있다.

저명한 동양사학자 나이토우 코난(1886~1934)박사는

8세기부터 히라노신사에서 칸무 천황이 제사를 모셨던 것은 이마키노카미(今木神, 백제의 성왕)를 비롯해서 쿠도노카미(久度神, 성왕의 선조), 후루아키노카미(古開神, 백제 비류왕과 근초고왕)등의 백제신이라고 단정했다.

또한 나카가와 토모요시도 백제신에 대한 지적에서

"히메노카미(比賣神, 백제인 화씨부인, 즉 칸무 천황의 모후)등 이 백제신들은

뒷날 헤이씨(平氏)의 씨신(氏神)이 되었다"고 논술했다.

또 타카야나기 미쓰토시등 여러 학자들도 똑같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칸무 천황의 생모 화씨부인(789년 사망)은 왜 왕실에서 백제조신(百濟朝臣)이라는 벼슬을 지낸
화을계(和乙繼, 야마토노 오토쓰구)의 딸이었다.

화을계 조신은 백제 무령왕의 직계 후손으로 백제에서 왜왕실에 건너가 조정의

조신으로 일했다.  이 당시는 백제 왕실의 왕족 다수가 왜왕실에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벼슬을 하던 것이 관례였다.

백제인이 세운 일본 무사정권

쿄우토의 히라노 신사에 모신 백제신들이 헤이씨의 씨신이 되었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헤이안 시대 후기의 최고 무장인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 1118~81)도 칸무 천황과 마찬가지로 백제인 후손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타이라노 키요모리야말로 일본 역사상 겐씨(源氏) 가문의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

토모(源義朝, 1123~60)를 무찌르고 왕조 국가의 군사력을 장악한 명장이다.

12세기 일본 무사시대는 백제인 타이라노 키요모리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멸망당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역시 백제인 무장이었다. 그는 백제인
세이와(淸和, 재위 858~876) 천황의 직계 후손이기도 하다.

겐씨 가문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패배한 후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뒷날 '단노우라 전쟁'(1185)에서 헤이씨 가문을 멸망시킨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3남인 무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였다.

이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92년 왕도인 헤이안경(지금의 쿄토)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 태평양 연안의 카마쿠라 땅에 무사정권을 세웠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이른바 '카마쿠라 막부'였다. 쉽게 말해 그 당시부터 천황가는 실권을

빼앗긴 채 다만 상징적 존재로 머물기 시작한 것이다.

1192년 7월 고토바 천황(1183~1198)은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운 무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무가 정치
를 승인하면서 그를 '정이대장군'으로 임명했다.

이른바 '쇼군'(將軍)이라고 통칭되는 무단 정치는 이렇게 백제인에 의해서 탄생된 것이다. 정이대장군인 쇼군은 전국 각지에 부하 무장인 '다이묘'(大名)를 임명했고, 각 지역 다이묘들은 제 고장을 무력으로 관장하는 체계를 마련하였다.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 시대는 1336년에 두 번째 무사정권인 '무로마치' 막부를

탄생시킨다.

이것은 무장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1305~58)가 이룩한 것이다.

1338년 그는 초대 쇼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무사정권은 200여 년이

지난 1573년에 막을 내린다.

이후 무장 오다 노부나가의 군사 독재 시대가 이어지고 계속해서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98)의 군사독재 시대가 전개된다.

그러다가 1603년 지금의 토우쿄우에서 에도 막부가 탄생한다.

이 당시 무장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됨

으로써 다시금 막부 무사정권 시대가 열렸다. 이 에도 막부 시대는 1867년 제 15대 장군 토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1837~1913)를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마침내 천황 친정체제가 부활해서 1868년부터 이른바 메이지 유신(明治

維新)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무사정권 시대의 발자취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무사정권은 백제인들에 의해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그 배후인 천황가 역시 백제인이었던 이다.

이것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황가에서 '니이나메사이(新嘗祭)라는

한국신 제사를 거행하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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