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字”, 그 失名으로 인한 오해
1. 序說
우리는 많은 이름들 속에서 살고 그 이름들 속에서 죽어간다.
특히 世上이 바뀌고 문화가 變化를 이룰 때마다 많은 이름이 새로 생기고 많은 말들이 새로 만들어진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서 그때까지 없었던 새로운 말, 새로운 이름을 만들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이 이름을 갖듯이 사람도 태어나면 固有의 이름을 갖는다. 사람들은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
그 사물의 작용과 용도를 가름하듯, 사람도 이름이 갖는 의미에 따라 그 사람의 생애에 커다란 작용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좋은 이름을 갖기 위한 노력을 함으로써 성명학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름에 대한 중요성을 맨 먼저 갈파한 이는 孔子이다.
공자와 자로의 문답을 보면 어떠한 사물을 무엇이라 이름 지어 부르느냐가 얼마나 절실하고 所重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자로가 묻기를 “위나라의 군주가 사부님을 맞아 정치를 하게 되신다면 장차 무엇부터 于先하시겠습니까?”
라고 하자,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할 것이다.”라고 공자께서 대답한 것이다.
論語, 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자로는 스승의 간결하고도 단순하기만 한 대답이 정치의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우원한 말씀이라
여기고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런 자로에게 공자는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이 자상히 말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順하지 않고,
말이 順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禮樂이 흥하지 않고,
예악이 興하지 않으면 형벌이 的中하지 않고,
刑罰이 적중하지 않으면 백성은 손발을 둘 곳이 없다.
공자는 바른 이름만이 말을 순하게 할 수 있고, 일을 이루며, 예악을 흥하게 하며, 형벌을 적중하게 할 수
있어서 백성들을 편하게 할 수 있다고 여겼다. 또한 이름이 바르게 붙여진 뒤라야 가히 입에 올려 부를 수
있고, 그것을 말로 표현한 뒤라야 생각할 수 있고, 그 생각하는 자리로부터 행동이 우러나게 되는 것이니,
오직 君子라야 그 이름에 구애됨이 없을 수 있을 따름이라고 附言하고 있느 것이다.
이 말을 가만히 되새겨 보면 이름 붙여 부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공자의 뒤를 이은 荀子도 이름의 중요성을 說破하였다.
이름을 정함으로써 사상의 혼란을 막을 수 있으며, 이름을 제정하는 근거는 오관의 느낌을 인식함으로써
사물을 알게 되고, 인식은 경험을 토대로 사물을 구별하는 능력이 생기고, 여기에 일정한 이름을 提共함
으로써 언어의 통일을 이루며 또한 약속에 의해 습성화된다. 이 약속에 어긋난 각자의 해석으로 언어를
사용할 때 혼란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름이 바르지 못해서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는, 공자와 자로와
순자의 시대만이 아니라 그보다도 오히려 오늘날 현저한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할 것이다. 특히 저 20세기 초엽의 전환점에서 이른바 新學問이란 이름으로 유입된 이름과 말들이 거의 日帝에 의해
만들어졌고, 우리는 여과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특수한 일제 강점기를 거치게 되었다.
이 시기에 命名된 이름들은 우리에게 여러 측면에서 誤謬와 오해를 불러오게 된다. 먼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있는 이름으로 잘못 만들어 진 것도 있고, 원래 의도하고자 하는 뜻과는 달리 우리가 誤譯한 경우도 많다.
광복 후에도 우리 스스로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많은 말들을 새로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어
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본래의 뜻과는 다른 역어(譯語)들이 적지 않게 만들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한자(漢字)”라는 이름이다. ‘문자(文字)’를 漢字라고 명명한 이후로부터 발생
하게 된 우리 역사의 인식과 문학의 인식에 심대한 오해를 유발시켜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먼저 ‘문자(文字)’가 창제된 역사를 개괄하고 그 창제의 주역이 누구였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고찰해본다. 다음으로 주변국들의 실제 사용 현황을 살펴봄으로써 ‘文字’가 본명을 잃고 ‘한자(漢字)’
라는 잘못된 이름을 갖게 된 연유를 파악하고, 그로 인해 발생된 여러 오해를 짚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커다란 역사적 오해와 우리 문화의 전반적 오해를 바로잡는 한 작업이 될 수 있으며,
우리의 文字정책의 방향을 결정짓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2. 文字의 創製
문자(文字)의 창제는 그 시작을 克明하게 밝혀 말하기 어렵다. 고대사의 뒤안길에 남아있는 흔적을 찾아
累千年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文字의 기원을 얘기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인지 모른다. 그러나 문자는
창제되었고 오늘까지 쓰이고 있기 때문에 창제의 기원에 대하여 자기 민족이 유리한 대로 주장을 펴고
있는 현실이다. 본 장에서는 인류 초기의 글자 생성과정 속에서 명명되어진 ‘문자(文字)’라는 이름의
고유성을 확인하고, 그 발전현황을 개괄하며, 또한 ‘문자’라고 명명한 主體勢力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1) 문자(文字)라는 이름
태호복희씨가 처음으로 팔괘를 그어 서계(書契)를 짓고 結繩에 의해 의사를 전달하던 방법을 대신하게
했다는 성인창제설이 굳게 자리한 가운데 저 황제의 史官 창힐(蒼詰)이 새들의 발자국을 보고 새의 종류를
구별할 수 있었던 데서 문자를 창제하기 시작하였다는 창힐의 창제설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게 시작한
‘文字’가 시대를 따라 발전하면서 그 주인도 역사의 무대를 따라 자주 바뀌어 인식되고 있다.
후한시대에 이르러 許愼의 "說文解字"에 의해 文字의 생성과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이루어 졌다.
먼저 모양을 형상화하여 글자를 짓는 象形과 추상적인 언어의 기호화를 통한 指事를 ‘문(文)’이라 하였다.
그리고 象形과 指事로 만들어진 旣成의 글자를 조합하는 방법인 會意와 形聲을 ‘자(字)’라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문자’마다의 본의에 의미를 부연하여 표현한 전주(轉注)와 음가나 형태를 빌려와 본래의
뜻과는 관계없이 다른 이름을 표현하는 가차(假借)의 방법을 운용함으로써 보다 발전적인 ‘문자’생활의
길을 확장시켰다.
다시 요약하면 ‘文’의 창조적 제작을 통하여 사물을 이름 짓기 시작하였고, ‘字’의 결합적 부연을 통하여 더
많은 사물의 이름을 기록하고 기억하게 하는 도구를 확장 시켰다. 뿐만 아니라 ‘문자’ 운용의 극대화를 통한
의미의 확산과 음가의 가차로 문자 생활의 원활함을 도모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禮記 빙례註에서 “옛적에는 ‘명(名)’이라 하였고 후세에는 ‘文字’라고 불렀다”고 하였으니, 각 사물의
이름으로서의 ‘문자’ 발생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하겠다. ‘문자’의 생성은 사물들의 이름이 명명되어진
과정이었을 것이라 단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근세에도 여전히 ‘文字’는 고유한 이름으로 존재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조선 세종임금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쓰신 서문에서 보면 ‘文字’로 명확히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짜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쌔,
이런 젼차로 어린 백성이 니르고져 �배 이셔도
마참내 졔 뜨들 시러펴디 �� 노미 하니라.
내 이를 위하야 어엿비 녀겨
새로 스믈여�짜를 맹가노니
사람마다 행여 수비 니겨
날로 쑤메 �한케 하고져 할 따라미니라.
이 서문에서 중국(中國)을 국중(國中)이라 인식하고 풀어보면 쉽게 창제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나라의 말소리가 온 나라 안이 같지를 아니해서
제주도 사람과 강원도 사람이 서로 만나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文字’와도 서로 유통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서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일반 백성들의 이러한 현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正音을 만들어 쉽게 사용토록 한 것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
따라서 ‘文字’를 굳이 한자로 표현하지 않았는데도 우리학계에서는 漢字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漢字라는 어휘가 朝鮮朝에 쓰였는지 궁금할 일이다.
그러나 조선조 각종 기록물을 점검해 보아도 ‘漢字’라는 어휘는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조선왕조실록 全篇 어디에도 ‘漢字’라는 어휘는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조선시대까지는 ‘漢字’가 아닌 ‘文字’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졌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왕조실록이 단일 왕조의 기록물로서는 가장 방대할 뿐만 아니라 사적 기록물로써 보존
상태가 대단히 완벽함을 인정하여 유네스코가 세계의 문화재로 지정한 귀한 문화재요, 훈민정음 창제
이후 두 종류의 國字가 쓰여진 시기의 실증적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 삼국의 사전류를 살피더라도 ‘文字’에 대한 해설은 공통적이다.
다음 표에서 보면 ‘文字’에 대한 개념을 설문해자에 근거를 두고 풀이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주변국 모두가 원래 ‘文字’라고 인식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변국의 “文字” 인식 비교
구 분 |
상세한화대자전 (일본,1916년) |
중문대사전 (대만,1973년) |
한어대사전 (중국, 1990년) |
文字 |
文と字と, [說文序] 依類象形謂之文, 形聲相益謂之字
|
ⓐ[예기 빙례주] 古者 文字曰 名, 後世曰 字 ⓑ[說文序] 蓋依類象形故謂之文, 形聲相益卽謂之字文者物象之本, 字者言자乳而침多也 |
[說文序]蓋依類象形故謂之文, 形聲相益卽謂之字 文字物象之本, 字者言자乳而침多也 |
2) 文字의 發展
‘文字’라는 고유한 명칭으로 창제 되어온 글자는 자체의 변천과 글자 수의 발전을 거듭하였다.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의 字體의 발전은 물론 글자의 수에 있어서도 괄목할만한 증가를 가져왔다. 여기서 觀心 分野는 文字 창제과정의 증가 추세이다.
後漢 시대 설문해자 당시 9,300여 자로부터 출발해서 현재 52,000여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세월을 지내
오면서 양적인 발전과 함께 운용하는 뜻의 증가도 말할 수 없이 많은 발전이 진행되었다.
아마 이러한 현상은 시대를 거듭하면서 계속될 것으로 짐작되어진다.
다음 표는 역대 자전 간행 현황을 간략히 나타낸 것이다. 시대별로 ‘文字’의 증가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국명 |
간행연대 |
서명 |
찬자명 |
수록자수 |
後漢 |
121 |
說文解字(540部) |
許愼 |
9,353 |
魏 |
|
廣雅 |
張揖 |
18,150 |
梁 |
581 |
玉篇 |
顧野王 |
16,917 |
隋 |
|
唐韻 |
陸法言 |
26,100 |
明 |
1615 |
字彙(214부) |
梅膺祚 |
33,179 |
明 |
1670 |
正字通 |
張自烈 |
33,400 |
淸 |
1716 |
康熙字典 |
康熙帝 |
48,651 |
朝鮮 |
1448 |
全韻玉篇 |
作者未詳 |
19,131 |
朝鮮 |
1589 |
大東韻府君玉 |
權文海 |
백과사전 |
日本 |
1919 |
詳解漢和大辭典 |
服部宇之吉 外 |
25,450 |
日本 |
1938 |
漢和大辭典 |
諸橋轍次 |
49,964 |
臺灣 |
1962 |
中文大辭典 |
張其균 外 |
49,905 |
中國 |
1986 |
漢語大辭典 |
陳翰伯 外 |
43,000 |
韓國 |
1987 |
明文漢韓大字典 |
金赫濟, 金星元 |
51,853 |
3) ‘文字’ 창제자로서의 夷族
그렇다면 이 “文字” 창제의 주역은 누구였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세상에 드러난 “文字”의 최초의
모습은 甲骨文 이라고 짐작된다. 이 갑골문은 殷나라의 옛 도읍지에서 발굴되고 있다. 현재의 영토 중심
으로 역사를 이해할 것이냐, 아니면 당시의 민족적 흐름으로 이해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지만
특히 이때의 중심 민족은 夷族 이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중국의 역사로만 인식하고 있는 舜 임금 이후의
夏代, 殷代의 중심 민족은 夷族 이었다는 점을 중국의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전적을 통하여 가능하다.
먼저 유가 경전을 통해서 확인이 가능하다.
맹자 離婁篇 下의 기록이다. 순 임금은 저빙諸憑에서 나서 負夏로 옮겨갔다가 鳴條에서 붕어하셨으니
동이계의 사람이다. 문왕은 岐周에서 나서 畢영에서 붕어하셨으니 서이계의 사람이다. 두 분은 피차간의
다스리던 땅의 위치가 쳔여 리 차이가 있고 피차간의 세대 차이가 천 여 년이나 되지만 뜻을 이루어
온 나라의 중심이 되어 천하에 정치를 행한 내용은 符節을 맞추는 것 같이 맞으니 선대의 성인과 후대의
성인은 그 행한 법도가 같다.
순 임금도 동이의 계통이요, 그 뒤를 천년 뒤에 이은 문왕 역시 서이의 계통이며, 그들이 천하를 다스리던
在位국의 위치는 천 여 리나 서로 떨어진 곳이었으나 결국 이들이 나라의 중심에 위치하여 천하에 베푼
정치가 부절을 합한 듯이 한결 같다는 맹자의 평가이다. 夷族의 역사적 실마리를 찾기에 충분한 말이다.
또한 이 당시 천하를 다스리던 민족은 夷族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夷에는 아홉이 있어서 九夷라 하였다.
후한서東夷傳에 의하면 견이,宇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元夷, 風夷, 陽夷 등 아홉 종류가 있다고 설명
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 간행된 고대 아시아 강역도에는 역력히 九夷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원이는 곧 동이요 백이는 서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논어 자한편에서 공자가 구이에 살고자 했던 내막을 살펴보면 이러한 실체를 가늠할 수 있다 할 것이다.
공자께서 九夷에 살고자 하더시니
或者가 말하기를 누추함을 어떻게 하려 하십니까 하니,
君子가 그 곳에 살았으니 어찌 누추함이 있었겠는가?
九夷는 공자의 同시대가 아니다. 바로 은나라 시대쯤으로 짐작할 수 있다.
천하를 주유하면서 도를 펴려던 공자는 결국 만년에 이르기까지 옳은 군주를 만나지 못하였다. 더욱이
스스로 군왕의 위치를 얻지도 못하였다. 차라리 仁이 무성하던 九夷에 태어났더라면 자신의 뜻을 알아줄
그런 세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탄식인 것이다. 그러나 스승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은 九夷의 실체를
몰랐던 모양이다. 하필이면 누추한 그곳을 그리워하시느냐고 반문한 것이다.
공자는 말하기를 그곳은 인자들이 居하였던 곳이기에 누추함이 없었노라고 단언하였다.
주자의 註에도 “동방의 夷는 구종이 있다. 그곳에 살고자 한 것은 또한 떼를 타고 물을 건너고자한 뜻이다.
군자가 처한 곳인즉 교화가 어찌 누추함이 있으랴.”라고 말하여 도를 천하에 펴지 못함을 안타까워한
공자의 심중을 이해하고 있다.
중문대사전에서도 說文通訓定聲 을 인용하여 이 부분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夷字는 또한 尸로 지으니 古文 仁字와 더불어 한가지로 쓴다.
蠻과 민은 蟲을 쓰고, 狄은 犬을 쓰고,
학은 표를 쓰고, 姜은 羊을 쓰니 다 다른 종족이다.
북과 僥는 人을 쓰고, 夷는 홀로 大를 쓴다.
夷의 풍속이 어질며 오래 사니,
또한 君子들의 죽지 않는 나라였다.
그래서 공자께서 九夷에 살고자 하신 것이다.
설문의 기록과 논어의 기록을 밝게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반면에 지금까지의 우리 언해본(諺解本)의 토씨와 해석은 사뭇 이와는 다르게 이해해 왔다.
우리 諺解本은 공자 같은 성인이 그곳에 살게 되면 누추함이 교화되어 밝아질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논어의 全編 어느 곳에서도 공자가 자신을 스스로 군자라고 자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소치이다. 뿐만 아니라 夷는 공자와 동시대가 아니며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九夷
시대인줄을 알지 못하고 夷를 비하(卑下)시켜서 의당 오랑캐라고 해석하는 오류(誤謬) 속에서 한 말이다.
東夷族이라 불렀던 夷族에 대한 근원을 후한시대 許愼의 설문해자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夷는 동방의 민족이니 大와 弓으로 이루어졌다.’ 하였고
그 注에 羊部에 말하기를 남방의 蠻과 민은 충으로 짓고,
북방의 狄은 犬으로 짓고, 동방의 학은 표로 짓고,
서방의 姜은 羊으로 짓고, 서남의 북인 초요는 人으로 지었으니
대개 서남방의 땅에 있어 자못 순리의 성품을 소유하였다.
오직 동이는 大로 지었으니 大는 사람이다.
夷의 풍속이 어질며 어진자 오래사니 군자들의 죽지아니한 나라니라.
살피건대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 또한 크니,
大의 형상이 사람모양으로서 夷의 篆字 大로 지었으니
夏와 같아서 다르지 않다, 夏는 가운데 나라의 사람이다.
弓으로 지은 것은 숙신씨가 고시와 석노를 貢한다는 類이다.
다른 민족들은 충, 견, 표, 양 등의 동물로써 그 종족의 이름을 지었으나, 서남쪽의 북인, 초요는 순리의
성품이 있어서 人으로 그 이름을 지었으며, 오직 동이만큼은 大로 이름을 지으니 大字의 뜻이 큰 사람이라
夷의 풍속이 어질며 어질기 때문에 오래 사는 군자들의 죽지 아니한 나라이며,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 또한 커서 그렇게 지은 이름이며, 특히 숙신씨가 고시와 석노를 만드는데 이바지한 바 있어서 궁자로
따라 짓게 된 이름이라 했다.
全韻玉篇에서도 平而大也, 悅也, 傷也, 陳也, 等也, 誅滅, 河伯빙夷, 卦名明夷 등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淸조에 이룬 강희자전에도 거의 유사하다. 특히 주역의 64괘 중에 明夷괘는 밝은 夷라 표현하였으나
공자는 그의 단전彖傳에서 역사적 변천을 서술하고 있다.
밝음이 地中으로 들어감이 明夷니
안은 文明하고 밖은 柔順하여 큰 환난을 무릅썼으니
문왕文王이 이것을 사용하였다.
어려울 때 貞함이 이로움은 그 밝음을 감춘 것이다.
안에 있어 어려우나 그 뜻을 바르게 하였으니
箕子가 이것을 사용하였다.
명이괘의 형상이 땅을 상징하는 곤괘가 위에 자리하고 불을 상징하는 이괘가 아래에 있어서 殷의 紂王이
政事를 간추리지 못하고 위로 어두워 빛이 땅속에 숨고 해가 서산에 지는 듯하니, 이것이 밝음을 상한
안타까운 明夷요, 西伯이 덕을 갖추어 안으로 그 밝은 빛을 갈무리 하고 밖으로 유순하니 그것이 곧 지혜
로운 明夷라는 뜻이며, 밝음이 傷해가는 역사의 말기에 어려움을 알아 그 貞正을 잃지 않으려 한 箕子의
처신 또한 明夷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夷族이 우리 민족의 조상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나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중국이 편찬한 이십오사의 전편에서 각각의 시대마다 기술하고 있는 동이전, 고려전, 조선전 등을 통해
분명하게 九夷가 동이족의 근원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기록 중에서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찬란했던 민족의 크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風流라 한다.
이 가르침을 設한 근원은 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다.
진실로 이에 세 가지 가르침(三敎)을 포함하여 군생에 대하여 교화 하였다.
가령 들어와서는 가정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라 함은 노사구(魯司寇)의 종지와 같고,
無爲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敎를 행하라 함은
주주사(周柱史)의 종지와 같고,
모든 악한 일은 하지 말고 모든 선한 일은 받들어 행하라 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의 교화함 같다.
난랑은 화랑의 한 사람이다. 신라 진흥왕 37년에 원화를 시봉하다가 罷散한 후에, 다시 미모남자를
취집하여, 혹은 道義를 相磨하며, 혹은 가악을 相悅하고, 그중의 善者를 천거하여 충신을 賢佐케 하니,
이것이 이른바 화랑이다. 화랑이었던 난랑의 비에 기록된 내용은 의미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곧 우리의 고대사를 仙史로 부르며 그 기록이 상세하다고 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상의 체계는
크고 훌륭하여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의 발원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곧 노사구는 공자가 魯나라의 大司寇의 벼슬을 하였다 하여 달리 부르는 말로 유교를 말하고,
주주사는 노자가 周나라의 柱下史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붙여진 노자의 별칭이므로 도교를 가리키며,
축건이 天竺의 별칭이므로 인도를 일컬으며 태자는 석가를 말하니 불교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음의 기록을 통해서
훌륭했던 민족의 후예가 文字를 창제하고 사용하였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古朝鮮記에 단제(檀帝)께서 戊辰 상달 초사흘에 이르러
신령한 대전에 거동하사 신고(神誥)를 가르치시니
때에 팽우(彭虞)는 삼천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머리를 숙여 받들며
고시(高矢)는 동해 가에서 푸른 돌을 캐어 오고
신지(神誌)는 돌에 이것을 그려 새겼다 하였으며,
후조선기(後朝鮮記)에 기자(箕子)가 一土山 사람 왕수긍(王受兢)을 맞아
박달나무를 다듬어 은(殷)나라의 글로써 神誥를 써서 읽었다 했으니
그러므로 神誥는 본시 돌과 나무의 두 책이 있었다.
渤海 文王 3년의 삼일신고 奉藏記에서 밝힌 내용이다.
신지가 기록했던 삼일신고는 푸른 돌로 이뤄져 있고, 왕수긍이 기록한 삼일신고는 박달나무를 깎아
만들었다고 하여 단제시대부터 기자에 이르기까지 “문자”를 사용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百濟만 하더라도 百家濟海의 줄임 말로 모든 제후들이 바다를 건너와 섬기던 나라였고,
고이왕(古爾王)52년 서기 285년에 王仁이 일본에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전하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梁무제 재위 (502-548)년간에 周興師가 지었다는 千字文보다 200여년이나 앞선 백제인의
천자문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 新羅本記 첫머리에 ‘일찍이 조선의 후예들이 이곳에 와서 산곡간에 흩어져 여섯 나라를 이루
었다 하여 한반도 내에서 자생한 민족이 아니라 광대한 대륙의 주인이었던 옛 조선의 유민이 건국한
나라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高句麗本記 영양왕 11년條에 ‘고구려는 國初로부터 文字를 사용하여 유기(留記) 百卷의
史書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당시의 文字生活의 현실성을 극명하게 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詩經硏究家 원형갑에 따르면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은 東夷문화의 神奇한 선진성을 내포
하고 있는 시편들이라고 예찬하고 있다. 詩經의 周南, 召南은 주나라 이전의 남방의 민요로서, 九夷의
圈域에서 채집된 노래들이라는 주장이며, 주남, 소남 이하의 시경의 시들은 결국 구이의 노래들 속에서
배우고 발전시킨 노래들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가 경전은 물론 중국의 사서, 사전 등과 우리의 역사 기록으로 볼 때
“文字”를 창제하고 발전시키기 시작한 主役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문학을 위시한 모든
문화는 역사와 함께 생성, 발전, 쇠퇴, 소멸한다고는 하나 우리의 민족사를 반도 내에서 이해하려 한다
든지, 아니면 우리의 고대문학을 민멸(泯滅)해버린 역사 탓으로 하여 기존의 왜곡된 역사의 틀에 억지로
맞추려는 발상은 더욱 커다란 오류를 증식해 내고, 급기야는 이러한 오해가 “文字”의 전래가 삼국시대
이전이냐 이후냐 하는 엉뚱한 이론을 들고 나오게 하고 만다.
단언하건대 문자창제의 主役은 동방 제 민족의 중심에 있던 夷族, 즉 우리 선조들이 창제하고 사용했던
우리 민족의 것이었으며, 반도로 수입되고 전래된 것이 아니라 그 후예들이 유민이 되어 직접 가지고
들어온 그들의 “文字”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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