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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은 동이족이 만든 글이다

동방존자 2007. 9. 4. 23:44

한문은 동이족이 만든 글이다


지금 우리가 한자(漢字)라고 부르는 것의 원래 이름은

문자(文字)였습니다.

그것은 중국사람들의 주장처럼 갑골문에서 진화되고

변형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개념과 상대적인 개념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문은 중국 글이 아니라 원래 옛날 동이족의 글입니다.

그리고 한문(漢文), 즉 문자(文字)가 없으면 기(氣)공부를

할 수 없습니다.

문자(文字)는 기(氣)의 모양을 그린 하나의 그림이며

기서(氣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알자면 기(氣)를 느끼고 체험해보아야 합니다.

또 기(氣)를 모르면 한문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가장 기본적인 구성은,

 

한 일(一)로 쓰는 가를 일(一)과 통할 곤(1)으로 쓰는

세울 곤(1)입니다.

 

다시 말해 한일(一)을 가로 선이라고 합니다.

가로란 가른다는 뜻입니다.

 

통할 곤(1)을 세로 선이라고 합니다.

즉,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한 일(一)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어졌는데,

왼쪽 앞이 뭉툭하고 그 사이는 위로 굽었고

다시 오른쪽은 뭉툭하게 모아졌습니다.

한번 팔로 허공에 한 일(一),

즉, 가로 일(一)을 그어 보십시오. 그 모양을 따온 것입니다.
서예 할 때 멋을 내기 위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은 가름으로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 일(一)의 뜻이 처음, 시작, 모두, 어느 하나,

하늘, 땅 등 여러 가지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가로(一)와 세로(1)는 서로 우리가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일반적인, 그리고 상대적인 개념들을 갖고 있습니다.

가로(一)와 세로(1)를 더하면 열 십(十)이 됩니다.

가르고 세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완성 십(十)이라고도 하고

수학에서는 더하기(十), 즉 플러스(十)라고 합니다.

두 이(二)는 같은 가로 선인 하나는 짧고, 하나는 길게

똑같지 않고 상대적으로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가를 일(一)과 세울 곤(1)이

파자(破字)공식의 첫 번째와 두 번째라면,

 

세 번째는 있을 주(.)입니다. 점 주(.), 심지 주(.)라고도

하는데, 우리에게 점(.)이란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파자(破字)에서는 그런 공식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두 개가 나란히 있으면 거듭 첨(″)이라 하고,

 

이 거듭 첨(″)과 완성 십(十)을 더하면 거듭 완성되었다는

뜻으로 뛰어날 두(斗), 나타낼 두(斗)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국에서는 곡식을 재는 한 말들이 용기 모양에서

상형된 것으로 보아 말 두(斗)라 합니다.

그러면 두각(斗覺)이란 한 됫박이 아닌 한 말들이로

깨달았다는 뜻인가요?

중국사람들의 들 입(入)자에 대한 해석은 없습니다.

그 둘을 따로 떼어 낸 것이 여덟 팔(八)입니다.

바른 뜻은 나눌 팔(八)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둘을 섞은 것이 다스릴 예(乂)입니다.
저리 움직이고 이리 당긴다 하여 다스릴 예(乂)자가

된 것이지요.

즉, 손동작을 표현한 것이 문자(文字)입니다.

머리 두(ㅗ)와 다스릴 예(乂)로 구성된 것이 문(文) 자입니다.
즉, 머리로 다스리다 또는 머리를 다스린다는 뜻이지요.

문(文)이란 글월 문(文)으로 쓰고 있지만,

 

원래는 무늬 문(文)으로서 그 자원(字源)은

중국의 풍습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잡귀가 범접 못하게 하고,

시신을 위한다는 뜻으로 시신을 곱게 단장하였고,

피는 귀신을 쫓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시신에 칼로 문신을 새겨 넣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연유에서 무늬 문(文)자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면 문명(文明)이란 머리를 다스려 밝게 한다는뜻이

맞는가, 아니면 시체에 무늬를 새겨 밝게 한다는 뜻이

옳은가요?

글자 자(字)의 뜻은 집 면( )자에 아들 자(子)로

구성된 것이니까, 집안에 아이들이 자라듯이 글자들도

필요에 따라 늘어났다는 뜻이라고도 하고,
집안에서는 아이들, 그 중에서 아들이 배우는 게

글자라 해서 글자 자(字)가 됐다고 하고 있으며,
아들 자(子)라는 것은 갑골문에서

머리통은 크고 팔 벌린 어린아이의 모양에서 상형되어

아들 자(子)가 된 것이고,
깨달을 료(了)는 마칠 료(了)로서

아이가 팔도 없이 태어났는데 다리마저 꼬여

오래 못산다 하여 마칠 료(了)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子)는
깨달을 료(了)에 한 일(一),

즉 가를 일(一)로 구성된 것입니다.
깨달아 갈랐다,  깨달아 가른다는 뜻이지요.

아들 자(子)가 아니라 원래는 깨우친 자(子)라는

문자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2,300여 년 전부터

2,500여 년 전까지는 분명히 깨우친 자(子)로 쓰여,

노자(老子)·장자(莊子)·공자(孔子)·맹자(孟子) 등

세상 이치를 깨달아 가른 사람들의 성(性) 뒤에

존칭으로 붙여졌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노자가 노씨 아들이라서,

장자가 장씨 아들 중 머리통이 커서,

공자가 공씨 아들 중에 팔 벌리고 서서

자(子)를 붙인 것이겠습니까?

깨달을 료(了)에 대해서 좀더 설명하면,

 

문자에도 한글의 기역(ㄱ)과 니은(ㄴ)에 해당하는

문자가 있습니다.

니은(ㄴ)은 숨을 은(ㄴ)이라고 사전에도 나와있습니다.
그러나 기역(ㄱ)은 없지만 숨을 은(ㄴ)의 상대적 문자니까

움직일 이(ㄱ)라고 합니다.

글자 자(字)는 보호할 면( )에 깨우칠 자(子)니까

보호하고 깨우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문자(文字)란 머리를 다스려 보호하고

깨우치게 한다는 뜻입니다.

더 풀이하면 머리를 다스리고 세워 덮어

깨달아 가르게 한다는 뜻도 되고,

더 깊은 뜻도 있습니다.

6만 8천자에 달하는 글자가 몇 개의 기호로 구성 될 수

있습니다.
문자의 유래를 살펴보면 볼수록 중국의 기록처럼

모호하고 모순 투성이인 기록들이 없었습니다.

문자는 고대 중국의 황제 헌원이 만든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의 사관(史官)이었던 창힐(倉詰)이

새나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만들어 바친 것이라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또 갑골문에서 진화된 것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고기(古記)인 <한단고기>에 보면

문자가 만들어지게 된 유래가

 

 다음과 같이 아주 상세하고도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웅천왕은 또 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다.
대저 신지씨는 세세토록 명령을 전하는 직책을 맡고

출납헌체(出納獻替)의 임무를 전담하고 있었는데,
다만 목소리에 의존했을 뿐,

일찍이 문자로 기록하여 남기는 방법은 없었다.

어느 날, 무리와 더불어 사냥에 나갔는데

갑자기 튀는 한 마리의 암사슴을 보고

활을 당겨 쏘려고 했으나 둘러보는 사이에

암사슴의 종적을 놓치고 말았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면서 산과 들을 지나

평평한 모래땅에 이르러 비로소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어지러이 흐트러져 연결되었으나 향한 곳은

절로 확실하였다.

마침내 머리를 떨구고 침묵 끝에

다시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기록으로써 남기는 일은 다만 이것 뿐이리라,
기록해 남기는 방법은 다만 이것 뿐이리라' 라고 하며

 

그날 사냥을 끝내고 돌아와

되풀이하여 다시 깊이 생각하고 널리 만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오래지 않아서 처음으로 문자를 만드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태고문자의 시작이라 한다.

그런데 후세에는 연대가 까마득히 흘러서 태고문자는

다 사라져서 존재치 않는다.
아마도 역시 그 만들어 놓은 것이 아직 편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일찍이 듣기로,

 

<남해도(南海島)의 낭하리(郎河理) 계곡 및

경박호(鏡珀湖)의 선춘령(先春嶺)과 저 오소리(烏蘇里)

사이의 바깥쪽 암벽 사이에서 언젠가 조각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며

사람들이 알 수가 없는 것>이라 했으니,
이게 신지씨가 만든 옛 문자가 아닌지 모르겠다.

여기에서 우리 나라가 아직 떨치지 못하고

우리 민족이 강하지 못함을 새삼 한탄한다."

<한단고기 신시본기>

"우리 나라의 문자는 옛부터 있었나니

지금 남해현(南海縣) 낭하리(浪河理))의 암벽에

신시(神市)의 옛 조각이 있다.  부여(夫餘) 사람

왕문(王文)이 쓴 바의 법류부의전(法類符擬篆)과

자부선생의 내문(內文)과 태자 부루의 오행(五行)은

모두 한단시대에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은학(殷學 : 갑골문자)과 한문은

아마도 왕문의 유범일진저!"

<한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대변설》의 주에 말하기를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의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있다」고 했다.
또, 가로되「대시(大始)에 옛것을 傳함에 있어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만 의지한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대저 문자의 근원은 나라의 풍습에 믿음을 존중하는 것
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 현재 남해에 있는 낭하리 계곡에 가면 신시(神市)의

고각(古刻 : 남해 각서라고 부른다)이 현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동중의 <삼성기>의 주에

「왜(倭)·진(辰)·여국(餘國)은 혹은 횡서(橫書)하고,

혹은 결승(結繩)하고, 혹은 계목(楔木)한다」고 있다.
오로지 고려만이 영법(穎法)을 모사했으니,

생각컨대 한단의 상고시대엔 반드시 문자의 모각(模刻)이

있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일찍이 신지의 옛 비석에 새겨진 천부경을
얻어

다시 또 첩을 만들고 이로써 세상에 전했으니

낭하리의 조각은 바로 모두 그 실체의 자취이다.
세상엔 전하기를「신시(神市)에는 녹서(鹿書)가 있고

자부(紫府)에겐 우서(雨書)가 있고 치우(蚩尤)에게는

화서(花書)가 있어, 투전문(鬪佃文) 등은 즉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伏羲)에겐 용서(龍書)가 있었고

단군에겐 신전(神篆)이 있었으니 이들 글자들은 널리

백산·흑수·청구·구려에 쓰여졌다」고 했다.
부여(夫餘) 사람 왕문(王文)은 처음 전문(篆文)을 번거롭다

여기고, 좀 그 획을 없애고 새로 부예(符隸)를 만들어

사용했다.

진나라 때 정막(程邈)은
숙신(肅愼)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의 예법(隸法)을 한수(漢水)에서 얻었고, 또 그 획을 계승하여

조금 바꾼 형으로 고쳤다. 그것이 지금의 팔분(八分)이다.

진나라 때 왕차중(王次仲)은 또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그는 왕문(王文)의 먼 후예이다.
지금 글자의 근원으로 삼는 것을 탐구해 보면

모두 신시(神市)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한자도 그 지류를 계승한 것이 명백하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즉, 문자의 유래를 살펴보면,

 

한웅천황(1대 거발한 한웅(居發桓, 94, B.C.3897, 120세,

일명 배달 한웅) 때인 신시(神市)시대에는

사슴 발자국 모양에서 따온 녹서(鹿書 : 녹도문(鹿圖文)이라고도 한다),
자부선생의 우서(雨書),

치우(蚩尤)의 화서(花書 : 투전문),

태호복희<5대 태우의 한웅(太虞儀, 93, B.C.3511, 115세)의

막내 아들>의 용서(龍書)가 있었으며,

단군시대에는 신전(神篆 : 가림토문으로 비정,
즉 오늘날의 한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한자(漢字)는 신시(神市)에서 전해진 법을

계승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단군조선시대에는 선대인 신시 배달국 시대로부터

계속 사용해온 진서(眞書),

즉 녹도문자(녹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움이 부족한 일반 백성들이 녹도문을 사용하기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또 음(陰)문자이며 만물을 형상화한 뜻글자인

녹도문만으로는 완전한 문자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3대 가륵단군 경자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조선의 문자인 가림토(加臨多) 문자(陽문자)가

탄생하게 되며, 이 가림토 문자(38자)를 토대로

더 쉽게 정리하여 4,177년 뒤 재창조된 것이

바로 훈민정음(28자)인 것입니다.

장자(莊子)는
"사람이 아는 것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이른바 이상하다는 것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단언할 수 없고,

세상의 이른바 이상하지 않다는 것도

그것을 이상하지 않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물은 그 자체가 이상한 것이 아니고

나의 생각을 거쳐야 이상해지는 것이기에

이상함은 결국 나에게 있는 것이지 사물이 이상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릇 나지막이 우거진 풀숲이나 나르는 주제로는

하늘에 날개를 드리우고 날아오르는 경지를 논할 수 없고,
소 발자국에 괸 물에서나 노는 수준으로는

붉은 용이 하늘까지 치솟는 경지를 이해할 수 없으며,
존엄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천상의 뜨락을
속된 악공이

발을 디딜 곳이 아니고, 뜬 다리도 없는 나루터를

평범한 뱃사공 따위가 건널 곳이 아니다.」라고

장자는 말했습니다.

사람의 영적인 진화를 방해하는 것이 셋이 있는데

 

그 중에 첫 번째가 잡스런 지식으로 자기가 아는 것 외에는

부정하려는 것입니다.
즉, 악착같이 고수하려는 쓸데없는 지적 기득권입니다.
내가 모르는데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는 교만과 오만,

자신이 아는 것 외에는 일단 부정하는 편견,
자신이 아는 것만을 진리인 양 착각하는 아집,

모든 것을 자신의 잣대로 재려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남이 말하면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황당하다, 터무니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왜곡은 자신의 지식으로 알지 못하는 것은

전부 믿을 수 없다고 부정하는데서 나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부터 깨달으라고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것입니다.